벽진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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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벽진 이씨는 신라 말 성주군 태수 이총언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이총언은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삼한 통일에 기여하여 벽진백에 봉해졌으며, 그의 후손들은 벽진을 본관으로 하여 6세까지 세거하다가 각지로 흩어져 정착했다. 조선 시대에는 산화공파, 대장군파 등 여러 분파로 나뉘어 많은 인물을 배출했으며, 이맹전, 이장곤, 이항로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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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 이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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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 이씨 정보 | |
기본 정보 | |
성씨 | 벽진 이씨 |
한자 표기 | 碧珍 李氏 |
국가 | 대한민국 |
관향 | 경상북도 성주군 |
시조 | 이총언(李忩言) |
중시조 | 알 수 없음 |
집성촌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전라북도 남원시 덕과면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
인구 (2015년) | 109,267명 |
순위 | 알 수 없음 |
주요 인물 | |
인물 | 이맹전 이장곤 이상길 이항로 이응준 이언주 이학수 이석채 이남두 이헌조 이헌승 이민헌 이윤기 이우익 이광기 이하정 지이 이종철 |
2. 역사
이총언(ㅡ李忩言)은 신라말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星州) 태수(太守)로서 벽진군(碧珍郡)을 수비하며 도적을 소탕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다.[1] 고려 태조 왕건이 삼한 통일에 함께 할 것을 권하자 아들 이영(李永)을 보내 후백제 정벌에 참여하여 고려 태조를 도운 공으로 삼중대광개국원훈 벽진백(碧珍伯)에 봉해졌고, 벽진대장군(碧珍大將軍)에 임명되었다.[1]
통일신라 말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군도(群盜)가 발호하는 등 혼란이 극심했으나, 벽진군의 유력한 호족(豪族)이던 이총언은 군정(軍丁)을 단결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여 이를 평정, 진압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 벽진군은 지정학적으로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고려 태조가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견훤에게 패배하여 크게 곤경에 처해 벽진군으로 들어오자, 이총언은 아들 영(永)에게 병졸을 거느리고 개경까지 종군하게 하였다. 그 공으로 이총언은 삼중대광개국원훈벽진장군(三重大匡開國元勳碧診將軍)으로 봉해지고, 은전(恩典) 또한 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많이 받았다. 또한 아들 영(永)은 태조의 대광(大匡) 사도귀(思道貴)의 딸과 혼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
그의 후손들은 벽진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6세까지 세거하다가 7세 이방화(李芳華) 대에 성주 명곡(椧谷)[일명 홈실]으로 이거하였다. 그 후 11세 산화선생 이견간(李堅幹)의 현손(玄孫) 5형제 대에 큰 수해가 나서 동네가 폐허가 되자, 5형제인 산화 5파 중 큰아들과 셋째 아들은 칠곡으로, 둘째 아들은 선산으로, 넷째 아들은 창녕으로, 다섯째 아들은 밀양으로 각각 옮겨 살게 되었다. 칠곡 약목으로 옮겨 살던 첫째 집은 17세 절충장군(折衝將軍) 이말정(李末丁)[1422~1474]대에 칠곡군 월오로 이거하였는데, 장자인 대사성 철균의 호를 따 동네 이름을 월오(月烏)[일명 달오]라 하였다. 또한 선산으로 이주한 둘째 집은 불사이군의 충신 생육신 경은 이맹전(李孟專)[1392~1480]의 손자인 18세 성균관 생원(生員) 이예원(李禮源) 대에 칠곡군 동명(東明)으로 입향하여 그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으며, 약목에 살던 셋째 집은 18세 진사(進士) 이인손(李麟孫) 대에 석전으로 입향하여 터를 잡고 여러 대를 살았다. 이후 벽진이씨들은 칠곡군 왜관읍 월오, 동명면 금암리, 지천면 웃갓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고 있다.[1]
2. 1. 시조 및 본관
이총언(ㅡ李忩言)은 신라말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星州) 태수(太守)로서 벽진군(碧珍郡)을 수비하며 도적을 소탕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였다.[1] 고려 태조 왕건이 삼한 통일에 함께 할 것을 권하자 아들 이영(李永)을 보내 후백제 정벌에 참여하여 고려 태조를 도운 공으로 삼중대광개국원훈 벽진백(碧珍伯)에 봉해졌고, 벽진대장군(碧珍大將軍)에 임명되었다.[1]통일신라 말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군도(群盜)가 발호하는 등 혼란이 극심했으나, 벽진군의 유력한 호족(豪族)이던 이총언은 군정(軍丁)을 단결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여 이를 평정, 진압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1] 벽진군은 지정학적으로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고려 태조가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견훤에게 패배하여 크게 곤경에 처해 벽진군으로 들어오자, 이총언은 아들 영(永)에게 병졸을 거느리고 개경까지 종군하게 하였다.[1] 그 공으로 이총언은 삼중대광개국원훈벽진장군(三重大匡開國元勳碧診將軍)으로 봉해지고, 은전(恩典) 또한 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많이 받았다.[1] 또한 아들 영(永)은 태조의 대광(大匡) 사도귀(思道貴)의 딸과 혼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
그의 후손들은 벽진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6세까지 세거하다가 7세 이방화(李芳華) 대에 성주 명곡(椧谷)[일명 홈실]으로 이거하였다.[1] 그 후 11세 산화선생 이견간(李堅幹)의 현손(玄孫) 5형제 대에 큰 수해가 나서 동네가 폐허가 되자, 5형제인 산화 5파 중 큰아들과 셋째 아들은 칠곡으로, 둘째 아들은 선산으로, 넷째 아들은 창녕으로, 다섯째 아들은 밀양으로 각각 옮겨 살게 되었다.[1]
벽진(碧珍)은 경상북도 성주(星州)의 옛 지명으로 가야국의 하나인 성산가야(星山加耶) 또는 벽진가야(碧珍加耶)에 속하였는데, 신라가 정벌하여 본피현(本彼縣)으로 바꾸었다.[1] 경덕왕 때 신안현(新安縣)으로 고쳐 성산군(星山郡)의 영현으로 하였다가 뒤에 벽진군(碧珍郡)으로 바꾸었으며, 고려 태조 때 경산부(京山府)로 고쳤다.[1]
2. 2. 분파
벽진 이씨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산화공파(山花公派) 이견간, 대장군파(大將軍派) 이성간, 금릉공파(金陵公派) 이당개, 문정공파(文靖公派) 이극송 등을 파조로 하는 분파가 형성되었다. 이견간을 파조로 하는 산화공파는 정헌공파, 판서공파, 감무공파, 참판공파, 려은공파, 도정공파로 분파되었고, 이성간을 파조로 하는 대장군파는 전서공파, 중랑공파, 평정공파, 감정공파로 분파되었다. 이당개를 파조로 하는 금릉공파, 이극송을 파조로 하는 문정공파도 있다.2. 3. 주요 인물
벽진 이씨('''벽진 이씨''')는 조선시대에 많은 인물을 배출한 가문이다. 고려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한 이대(李玳)는 1337년(충숙왕 6) 충청도 존문사가 되었고, 1342년(충혜왕 3) 삼도순무사를 거쳐 1343년(충혜왕 4)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동의회부감사, 수문전 대제학을 역임했다. 이성간(李成幹)은 지추밀원사를 역임했으며, 어릴 때부터 병법을 좋아하고 기사에 뛰어났다. 충선왕 및 충숙왕 때 중문지후, 대장군을 지냈으며 충성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형 이견간(李堅幹)은 행의가 고결하고 학문이 굉박하여 중국의 주나라 예악과 당나라 풍조의 문장에 능했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는 태학사 주 방과 춘추대의를 강론했고, 주 방은 그를 "천하의 큰 선비"라 칭찬하며 종이 상전을 대하듯 했다. 고려 충렬, 충선, 충숙 3조에 걸쳐 벼슬하여 통헌대부, 민부전서, 진현관대제학, 지밀직사사, 홍문관사를 역임했다.이맹전(李孟專)은 자는 백순, 호는 경은으로, 1427년(세종 9)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거쳐 정언이 되었다. 이후 소격서령, 거창현감 등을 지냈으나,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키자 벼슬을 버리고 선산으로 내려갔다. 김숙자 등과 학문을 교유하며 30여 년간 두문불출하고 학문에 정진했다. 1781년(정조 5)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선산의 월암서원과 함안의 서산서원에 생육신으로 제향되었다.
이등림(李鄧林)은 청백리이자 효자로 이름났다. 1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간 여묘살이를 했다. 인동현감 재직 시절, 노비가 새 짚신을 신은 것을 보고 관물이라며 경고하고 괘혜암에 걸어두고 떠난 일화가 전해진다. 그의 청렴결백함을 기리기 위해 구미시에서는 괘혜암을 지방문화재 제184호로 지정했다.
이장곤(李長坤)은 자는 희강, 호는 금헌, 학고, 우만이며, 김굉필의 문인이다. 1495년(연산군 1) 사마시에 장원, 1502년(연산군 8) 알성문과에 급제했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함흥으로 도망쳐 숨어 살았다. 1508년(중종 3) 박원종의 추천으로 복직하여 홍문관 부교리, 교리, 사헌부장령, 동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학문과 무예를 겸비하여 중종의 신임을 받았으며, 여진족 격퇴에 공을 세웠다.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역임했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된 사림들의 처형에 반대하다 삭탈관직되었다.
이항로(李恒老)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로, 자는 이술, 호는 화서이다. 주리철학을 재건한 3대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기이원론의 입장에서 이와 기를 구별하고 차등적으로 인식하여 이가 주가 되고 기가 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족교육자로서 춘추대의와 척사위정을 내세워 민족주체의식을 고취하고, 한말 창의 호국운동의 주역들을 배출했다. 최익현, 김평묵, 양헌수, 유중교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3. 항렬자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49세 | 50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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口일(一) 口후(厚) 口화(和) | 원(元) 운(雲) 우(愚) 노(魯) | 口언(彦) 口두(斗) 口중(中) 口기(基) | 헌(憲) 선(善) 종(鍾) 석(錫) 택(澤) 호(鎬) | 口원(源) 口수(洙) 口순(淳) 口하(河) 口오(五) 口오(吾) | 종(種) 수(秀) 근(根) 상(相) 병(柄) 상(商) 장(章) | 口하(夏) 口희(熙) 口환(煥) 口섭(燮) 口택(宅) 口세(世) | 규(圭) 연(延) 중(重) 경(坰) 치(致) 익(益) 의(義) | 口의(義) 口흠(欽) 口욱(旭) 口수(銖) 口현(鉉) | 한(漢) 태(泰) 영(泳) 호(浩) | 口수(秀) 口영(榮) 口표(杓) 口목(穆) 口식(植) | 휘(輝) 용(容) 충(忠) 광(光) | 口주(周) 口채(埰) 口원(遠) 口균(均) | 진(鎭) 영(寧) 용(鏞) 녹(錄) | 口택(澤) 口식(湜) 口낙(洛) 口홍(洪) | 병(秉) 동(東) 정(楨) 낙(樂) | 口열(烈) 口엽(燁) 口훈(熏) 口찬(燦) | 치(致) 돈(墩) 배(培) 강(堈) | 口용(鎔) 口정(鉦) 口일(鎰) 口은(銀) | 준(浚) 한(漢) 해(海) 철(澈) |
4. 현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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